조선의 왕릉은 대개 한양으로부터 80리 안에 있다. 그러나 단종의 장릉은 유배지 였던 강원도 영월에 있다.
장릉은 서울에서 500리나 떨어진 첩첩산중이며, 그 마저도 야산에 가매장된 지 30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왕릉으로의 모습을 갖추었다.
단종의 복위 작업은 왕릉 건립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종묘와 왕릉에 국한되던 다른 왕과 다르게 단종의 추모 공간은 영월 곳곳에 있는 그의 유배지와 그 충신들의 사적으로까지 넓혀져 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례적 조선왕릉
조선 왕릉은 풍수적으로 길지여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한양으로부터 80리, 즉 40킬로미터 이내 이어야 한다는 거리상의 조건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정기적으로 선조의 능에 참배하는 행차를 하였는데, 거리가 멀면 준비하는 신하나 백성의 수고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릉 중에 이러한 조건에서 벗어난 능이 유일하게 하나 있는데, 바로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이다. 단종은 1456년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12살의 나이로 즉위한 지 4년이 되는 해였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그의 삼촌, 수양대군은 왕위를 노리고 단종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결국 더 이상의 참사를 막고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빌미로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유배 보내기에 이른 것이다.
단종이 영월에 도착하여 처음 거처한 곳은 청령포였다. 청령포는 한 면은 산으로 막히고 삼면은 센 물살이 흐르는 곳이니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던 단종은 몇 개월 후 큰 홍수가 들자 거처를 영월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겼다. 관풍헌 옆에는 매죽루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단종은 그곳에 올라 두견새에 자신을 비유한 슬픈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들 청령포, 관풍헌, 그리고 매죽루(후에 자규루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단종의 유배 시절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되었다.
1457년, 단종은 관풍헌에서 겨우 1년 남짓 보내고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수양대군은 세조로 등극하였지만 계속되는 단종의 복위 운동을 두려워하여 결국 그에게 사약을 보낸 것이다. 단종의 시신은 인근 동을지산에 가매장되었다. 아무도 거두려는 이가 없었던 단종의 시신을 당시 지방의 낮은 관리였던 엄흥도가 거두어 인근 야산에 묻었다. 산이나 들에는 묘를 쓰지 않고 배산임수의 낮은 언덕에만 쓴다는 왕릉의 풍수 조건은 지켜질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단종의 장릉은 서울에서 500리 떨어진 첩첩 산중에 놓인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단종의 장릉과 단종비 정순왕후 사릉
단종의 묘역이 지금과 같은 왕릉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698년 숙종 대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왕위가 추복된 이후였다.
단종의 사망 이후 방치 되었던 묘역은 중종과 선조, 현종을 거치면서 간단한 묘비와 관리인 참봉을 갖추는 등 점차 개선되어 갔다. 그러나 이전 사례가 겨우 신하들의 장계를 수용한 정도라면, 숙종 이후의 사업은 국왕에 의해 적극적으로 진행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숙종은 ‘단종’이란 묘호를 내림과 함께 단종과 단종비의 묘소에도 각각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리고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봉릉도감을 설치하여 정식으로 능을 건립하였다.
그렇다면 250년 넘게 시행되지 못한 단종의 추복 문제가 숙종 대에 들어 오히려 국왕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숙종은 단지 단종의 추복만이 아니라 사육신의 복권에 특별히 힘썼다.
사육신이 어린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단종이 특별한 성군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왕실의 종사를 이은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사육신이 보여준 무조건적인 충절을 그의 시대에도 구현하고 싶어했다. 그는 사육신뿐 아니라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어 포상하였으며 그들을 위한 사당을 건립하고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의 ‘창절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처럼 단종과 사육신의 추복은 충절의 데올로기로서 숙종의 왕권 강화 정책의 기반이 된 것이다.
숙종의 단종 유적 정비사업은 영조와 정조 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영조는 장릉에 비를 세우고 정자각과 수복실을 세움으로써 왕릉의 구성을 완성하였다. 단종이 살던 청령포의 옛터도 찾아내고 이곳에 어필 비각을 내려 기념하였다. 한편 영조는 신하들만이 아니라 백성들을 충신으로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단종을 장사 지낸 하급관리 엄홍도를 비롯하여 단종이 죽자 따라 죽은 시종 등이 포상되었다. 시종들이 투신하였다는 금강의 절벽 위에는 백성들을 위한 사당 민충사(충심을 가엾이 여긴다)가 건립되었다. 숙종과 영조가 사당이나 비석과 같은 전통적인 추모 양식을 따랐다면, 정조는 이미 허물어지거나 사라지고 없는 건물을 발굴하고 재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정조는 단종이 머물렀던 객사 관풍헌과 정자 자규루를 복원하였다. 기록에 근거해 터를 고증하고, 새로 건물을 건립하고 유적이라 칭하였으니 마치 현대의 사적 복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단종에 대한 기록역시 공식적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가에서 전해지는 비공식적인 기록들을 종합하여 ‘장릉사보’라는 관찬서를 펴냈다. 이처럼 공간의 재건과 시간의 재편은 정조 추복 사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월중도와 단종의 사적
월중도는 영월에 있는 단종과 관련된 사적지를 8점에 나누어 그린 화첩이다. 단종의 무덤인 장릉, 유배지인 청령포와 관풍헌, 그리고 자규루뿐 아니라, 절의를 지킨 신하와 백성의 사당인 창절사와 민충사를 한 폭씩 할애하였다.
나머지 2점은 읍내를 중심으로 한 대축적 읍치도와 지리적 형세를 그린 소축척 영월부 지도이다. 즉 단종과 충신들의 사적을 차례로 열거한 후 마지막으로 지리적 정보를 추가하였는데, 이러한 화첩의 구성은 영월의 과거와 현재를 개관화시킨 관리자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월중도’는 단종의 사적이지만, 단종이 살아있던 때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숙종 대 이후 진행된 사적 복원 사업을 정리한 것이다. 정확히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연간까지의 사업을 담고 있으며, 영조를 일러 ‘선대왕(先大王)’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정조대의 기록으로 보인다.
정조 대에 제작된 ‘장릉사보’의 판화 삽화와 ‘월중도’ 그림의 밀접한 관계는 이러한 가정을 더욱 뒷받침한다. 물론 궁중에서는 보수와 복제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니 후대에 다시 임모한 본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월중도’는 영월 유적에 대한 종합 보고서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정조가 편찬한 ‘장릉사보’가 실록에서 야사에 이르기까지 단종에 대한 모든 기록을 종합한 역사서라는 점과 유사하다. ‘월중도’는 산릉도, 건물도, 실경산수화, 회화식 지도 등의 이질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각 유적지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단종의 무덤과 그 주변을 그린 ‘장릉도’는 부분적으로 산릉도의 형식을 취하였다. 능상을 중심으로 산세가 마치 손가락처럼 감싸고 있는 표현 방식은 풍수지리적 지세를 나타내는 산릉도의 형식이다.
장릉의 터는 애초에 풍수를 따져 선정되지 않았지만 그림 속에서 산릉도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풍수적 길함과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함께 부여 받았다.
단종의 첫 유배지를 그린 ‘청령포도’는 산수화 형식을 띠고 있는데 물줄기만은 위에서 내려다 본 회화식 지도 기법으로 그렸다. 이렇나 이중적인 시점은 청령포의 지리적 특징을 더욱 잘 보여준다. 청평포는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 싸여있고, 나머지 한 면마저 층암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처럼 폐쇄된 청령포의 지형은 단종의 고립된 유배 생활의 고통을 가장 잘 상징하는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청령포도’는 그 지형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