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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처럼 아름다운 강화도 여행

이 땅의 중부 서해 바다로 흘러드는 예성강, 임진강 그리고 한강.., 이 세 강물은 국토의 중부 위아래 지역을 굽이쳐 흐르다 약속이나 한 듯 인천 앞바다 한 곳으로 흘러들며 삼 형제처럼 상봉을 한다. 그 만남의 장소에서 숨가쁜 강물이 쉬어가도록 자리한 커다란 섬이 바로 강화도 이다.

강 풍경이 아름다워 ‘강꽃섬’이라 하고 ‘강화도(江華島)’라 불렀을까? 아니면 그 무엇이 화려하여 강화(江華)라는 지명을 붙였을까? 어쨌든 이 섬 고장은 한 때 백제의 땅도 되었다가 훗날 고구려 땅도 되고 통일신라의 땅도 되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부터 지금의 이름인 ‘강화도’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옛 기록에 나타난 이 섬의 최초 이름은 백제의 ‘갑비고차 (甲比高次)였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 글자가 없었을 적에 우리말 한 음절을 초성과 종성으로 나누어 두 음절의 한자로 표기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적힌 ‘갑비고차’가 바로 우리말의 ‘갑곶’이다. 지금도 이 섬. 강화도에는 ‘갑곶리’, ‘갑곶돈대’ 와 같은 지명과 유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갑’은 ‘두 겹’ 또는 ‘갑 절’ 등 겹친 모양을 의미하고 ‘곶’은 ‘꼬쟁이’, ‘꼬치’ 등의 의미로 ‘장산곶’, ‘장기곶’ 등지의 지명처럼 해안가의 불쑥 튀어나온 땅을 의미한다.

강화도 지도를 보면 김포 쪽의 육지에 접한 포구들이 튀어나와 ‘월곶’, ‘대곶’이 되고 그 맞은편으로 좁은 바다 건너 강화도에 ‘곶’들이 즐비하니 이곳이 바로 겹겹으로 곶이 즐비한 이른바 ‘겹곶’이 되고 옛말로는 ‘갑곶’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강어귀에 있는 곶이니 ‘강곶’이라고 불렸을 터인데 예전에는 꽃도 ‘곶’이라 불리었으므로 ‘강곶’은 ‘강꽃’ 즉 ‘강가에 핀 꽃’으로 의미가 통하였으니 고려시대에 들어 멋들어진 조상님들은 영문도 모른채 ‘강곶’을 강가의 꽃인줄 알고 아예 한자로 ‘강화(江華)’라 이름을 붙였으리라.

이리되면 결국 ‘갑곶’, ‘겹곶’, ‘강곶’, ‘강화’ 등의 지명은 발음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백제 때부터 오롯이 이 고장을 지켜온 오랜 이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화도가 지켜온 것을 이름뿐만 아니었다. 이 땅에 나라도 글자도 없던 태곳적 선사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는 물론 서양의 열강 제국과 충돌하던 최근세 그리고 분단의 현 시점까지 우리 역사 속의 자취를 수도없이 남긴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강화도,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강화도는  섬 한 곳에 국보, 보물, 사적 등 국가 지정문화재만 34건, 경기도 지정문화재까지 합치면 100건이 넘는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경주 같은 옛 도읍이나 서울, 대구 등 대도시가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수량의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비록 섬이지만 한 때는 고려의 왕도가 되기도 했고 머나먼 옛날에는 오늘날의 세계문화유산 대접을 받는 고인돌 들을 축조하던 곳이 바로 이 고장이다. 강화도는 하루 이틀 잠깐 들렀다 가는 예사로운 고장이 결코 아님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역사 유구한 고장이기에 단군시대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던 우리의 고유 신앙 유적인 참성단이 있고 이러한 고유 신앙은 훗날 대종교, 한얼교 등으로 발전하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강화 천도와 함께 고려대장경 판각 등 거국적인 불사를 일으켰던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또한 강화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보전하고 외규장각을 지어 왕실 도서를 지켜낸 곳이며 ‘강화학파’라 불리는 선비들이 양명학이라는 신유학을 탐구하기도 했던 진보적 유학 사상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강화도에선 국가와 민족을 신앙으로 지켜내기 위하여 가장 위대하고 처절한 역사의 자취를 남긴 종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불교였다. 특히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몽골의 대 제국이 중국을 집어삼키고 고려왕조까지 침입해오자 고려 왕실은 아예 왕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전에 돌입하는 동시에 부처님의 원력으로 고려를 지켜 주기를 갈망하며 팔만대장경 조판이라는 거대한 호국불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신원사지 터

신원사와 팔만대장경

고려는 개국 초부터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우리 역사 속에서 불교가 가장 널리 퍼져나간 시대였다. 고려 전기 현종임금 (재위 1009~1031) 때 중국 북방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침입해 왔고 이를 물리친 이후에는 엄청난 양의 대장경을 판각하고 이를 소중히 보전하는 대규모 불사를 일으켰다.

대장경을 봉헌함으로써 다시는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부처님이 나라를 지켜주리라는 믿음, 즉 고려의 호국불교 사상이 그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대장경이란 이 세상에 나와있는 모든 불경과 그 관련 자료를 총 집대성한 것으로 이를 서적으로 인쇄 출간하기 위한 목판을 완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려대장경 초판은 현종 임금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니 대장경을 완성하여 대구 부인사에 운반, 보관하기까지 60여 년이나 걸린 거국적인 불사였다. 이를 초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이 초조대장경 판각은 동아시아 불교 국가 중에서 중국 북송에 이어 두 번째로 완수한 대업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 스님은 중국, 거란, 일본 등지의 불경과 관련 자료를 두루 수집하여 초조대장경에서 빠뜨린 것까지 모두 망라하여 그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른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 하고 이 때 증보 판각된 대장경을 ‘대장경의 속편’이라 하여 ‘속장’ 또는 ‘속장경’이라 부른다.

그런데 철저하게 믿었던 대장경의 호국원력에도 불구하고 몽골이 침입해오고 고려 왕실은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왕도롤 옮긴다. 또한 몽골의 침공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존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왕실은 강화도에서 또다시 부처님이 나라를 지켜 주기를 기원하며 대대적인 대장경 조판을 시작한다. 고려 고종 임금 때 시작된 대장경 조판불사는 16년간이나 지속된 후 완성을 보았는데, 이 대장경을 ‘재조대장경’ 또는 조판된 목판의 숫자가 8만 1,258장에 이르렀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팔만대장경의 조성불사를 담당했던 총 본부가 바로 강화도의 선원사였다. 선원사는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추고 있던 사찰이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대장경 조판을 위한 임시 관청인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팔만대장경 목판이 완성, 보존되었는데 이 대장경판은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이전되고 다시 세조임금 때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