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를 지킨 강화도 전등사
강화도의 동남부에는 정족산이 우뚝 솟아 있고 이 산 아래 정족산성이 산허리를 두르고 있다. 또한 산성 안에는 강화도에서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등사’가 자리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 사찰이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원종 임금 때 (1266) 중창되고 충렬왕 때 (1282) 왕비였던 정화궁주( 貞和宮主)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 이름이 전등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 말기에 두 차례 중수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두 차례 화재를 입어 인조 임금 때(1625)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숙종 임금 때 (1678) 부터는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 (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 왕실의 비호를 받게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전등사는 산성 안에 세원진 산성 사찰이다. 산성 사찰이란 평시에는 불교 도량이지만 유사시에는 조정과 긴밀히 연락망을 유지하며 적의 동향을 보고하기도 하고 전쟁 시에는 실제로 군병의 주둔을 돕거나 아예 승병을 훈련하고 거주하게 하는 역할도 더불어 수행하는 곳이다. 더구나 이곳 전등사 바로 옆에는 ‘조선왕조실록’ 까지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말기 병인양요 때 (1866)에는 실제로 관군과 프랑스 군이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정족산성이었으므로 전등사는 불법 수호와 함께 군사적 지원과 국가 안녕을 기원하는 성내 사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온 것이다.
전등사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전, 적묵당, 강설당, 종각 등이 있다. 대웅전 (보물178호)은 광해군 때 (1621)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는 석가, 아미타, 약사여래 등 삼존불상이 있으며 1880년에는 그린 후불탱화와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조성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또한 대웅전의 지붕 밑 네 귀퉁이의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부상 (裸婦像)이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의 주막에 거쳐하며 주모에게 돈과 물건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무렵 주모는 그 돈과 물건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손에 약단지를 들고 중생을 병마와 죽음의 고통에서 구제해 준다는 ‘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있다. 인간의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명부전에는 한가운데에 지장보살이 있고 좌우에는 저승의 재판관인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분의 시왕이 도열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전등사에는 소장된 주요 유물로는 보물 제 393호인 전등사 철종을 들 수 있다. 대부분 사찰의 종은 구리를 주재료로 한 동종인데 이 종은 무쇠로 만든 중국제 철종으로 1097년 중국 하남성 수명사에서 조성된 것이다. 이 종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군수물자 수집 공출로 들어왔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마니산 정수사
강화도 서남부에는 이 섬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 온 마니산이 솟아 있다. 산 정상부에는 하늘에 제사지내던 참성단(塹星壇)이 있고 서남부의 산 중턱에는 맑은 물이 샘솟는 ‘정수사’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부터 절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 임금 때 (1426) 고승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중창하였는데 법당 왼편 뒤쪽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절 이름을 정수사로 지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 산령각, 대방, 노전(爐殿), 요사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정수사 대웅전(보물 161호)은 그 법당의 꾸밈새가 매우 특이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보호를 받고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맞배지붕’ 건물인 이 법당은 1957년 보수공사 때 상량문이 발견되어 이 법당이 숙종 15년(1689)에 수리되고 원래는 세종 임금 때 (1423)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둥에는 고전적인 배불림 기법이 남아 있으며 처마 밑의 짜임새도 단정하고 간결하다.
그런데 이 건물이 인상적인 것은 후대에 수리되면서 법당 앞에 마루를 달아내어 마치 일반 전통가옥 처럼 툇마루를 지나 법당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불교 건축이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반 가옥 건축과 친화된 현상으로 풀이될 수 있다. 여기에 법당 앞면의 중앙 칸에는 꽃병 위로 여러 줄기에 꽃이 핀 듯한 꽃살 무늬 창호가 장식되어 있는데 다른 사찰의 꽃살창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 기법이다.
봉은사터, 장정리 오층석탑
강화도 서북부의 하점면 장정리 마을의 봉천산 중턱에는 절터가 있고 절터 한가운데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이 절터는 봉은사 터라 전해지고 있다. 봉은사는 원래 개성에 있는 커다란 왕실 사찰이었는데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이전해 오면서 이곳에 개경의 봉은사를 대신한 또 하나의 봉은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정비된 절터와 샘물터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려 왕궁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이러한 사찰의 유래가 생겼을 수도 있다. 이 석탑은 과거에 무너져 있었는데 1960년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보수, 재건되었다. 그러나 파손이 심하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 현재는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그리고 꼭대기 장식 부분인 상륜부 등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모습으로 추정되며 자연석으로 구획된 바닥위에 판자돌을 조합하며 기단벽을 만들고 그 위로 널찍하고 두툼한 판석 하나를 덮어 기단을 완성하였다. 탑신부는 1층만 두 덩이의 돌로 몸돌을 조립하고 2층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있다. 3층 이상은 없어진 부분이 많으나 2층과 같은 방식으로 추정된다. 기단 4면과 탑신 몸돌의 4면에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긴 흔적도 보인다.
탑신부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높이와 넓이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비교적 평편하고 얇은 편으로,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 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 밑은 직선이나 네 귀에서 약간 들려있다. 전체적으로 이 석탑은 질박함이 넘치는 민예적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비록 임시 왕립 사찰이었다고는 하나 강화도란 지역적 토속적, 민예적인 조형 기법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강화 천도 후 하루빨리 절을 짓고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는 탑도 급조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적 상황이 이러한 민예적인 탑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래부터 강화도 섬마을에 민예적으로 만든 탑이 있던 절 하나를 선택하여 봉은사로 격상시켰을 수도 있다는 역설적 가정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