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점 봉씨와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하점면 장정리 오층석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석조여래입상이 세워져있다. 이곳 역시 고려 왕궁에서 가까운 봉천산에 속한 또 다른 계곡을 끼고 사찰이 세워졌다는 증거의 장소이다. 이 석불상은 두꺼운 판석위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으로 전체적으로 장대하고 불신의 비례가 좋은 편이나 큰 얼굴, 좁은 어깨, 큰 손 등에서는 다소 균형감이 어긋나 있다. 역시 강화도의 지역적인 민예풍의 조형이 섞여 있다고 하겠다.
이 석불상은 지금은 보호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근 편이며 입가부터 양쪽 볼과 눈매에 이르기까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전체적으로 입상의 하반부는 간략하게 조각되고 얼굴의 표현, 옷 주름의 층단식 처리 방식 등에서 고려시대 중엽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고려 예종 1년 (1106)에 한 노파가 연못가에 빨래를 하러 나왔는데 갑자기 오색 무지개가 찬란하게 비추고 연못에서 옥함이 떠올라 열어보니 옥동자가 비단에 쌓여 있었다 한다. 노파가 신기하여 아이를 임금에게 바치고 궁중에서 기르게 하였는데 아주 총명하여 임금이 ‘봉(奉)’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소년은 10세때 등과한 후 고려 조정에서 큰 벼슬에 올랐고 이후 5대손 봉천우가 정승에 올라 조상의 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석조여래입상(일명-석상각)을 세우고 매년 제례를 올려 은혜에 보답하였다 한다. 이 설화는 마치 삼국시대의 시조 설화를 보는 듯하며 혹은 부계가 확실치 않은 인물의 시주 불사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석모도 관음성지 보문사
강화도에 이웃한 석모도에는 우리나라의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으로 추앙받는 보문사가 있다.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순조 12년 (1812)에 중건되고 1867년에는 나한전이 세워지고 1893년에는 요사채와 객실이 중건되었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6년 범종이 조성될 때까지도 여러 차례 중건불사가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대웅전, 관음전, 대방(大房), 종각, 석실 등이 남아있다. 또 경내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가 9미터가 넘는다. 또 천인대는 1,000명이 앉을 수 있는 바위라 하여 천인대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관음보살이 바닷가의 ‘보타락가’산에 거주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해안 절벽과 풍광이 좋은 곳을 마치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보타락가산이라 여기고 이를 줄여 ‘낙가산’, 또는 ‘낙산’이라 불렀다. 바로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가 위치한 곳도 그런 관음도량으로 만들어 이곳의 산을 ‘낙가산’이라 불렀고 강원도 동해의 ‘낙산’ 역시 그런 관음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강화도의 불교문화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보슬비가 모래사장을 적시듯 소리없이 법등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오히려 고려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더 크게 꽃을 피우며 풍랑의 역사를 견디었으리라고 본다.
위대한 불법의 집대성인 고려대장경이 만들어진 성지가 바로 강화도였으며 또한 섬마을 민초들의 질박한 기도가 담긴 석탑과 불상이 만들어진 곳도 강화도였다. 조선시대 말기 철종이 소년 시절에 ‘원범’이란 무명의 목동으로 지내면서 사랑을 나누었던 ‘양순’이 처녀가 남친을 왕으로 보내고는 어쩔 수 없이 불가의 여승으로 귀의한 곳도 강화의 어느 사찰이었을까…. 강화도의 불교 유적은 찬란하거나 질박하거나 뭉클한 역사의 아련한 그림자 속으로 방문객을 상념게 잠기게 한다.
강화도의 고려왕릉을 찾아서
강화도에 능이 있다. 접할 수 없는 고려의 왕과 태후가 묻힌 능이 4기나 있다. 그렇지만 능이라고 해서 능인줄 알지 조선왕릉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면 보잘겂 없어 보이고 찾아가기도 쉽지않다.
북한에 있는 능 또한 마찬가지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顯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 외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의 능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라하다고 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망한 왕조의 능일지라도 그 자체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있을 터, 애틋하지만 강화도를 찾으면 빼놓지 말고 봐야 할 곳 중 한 곳이다.
강화도는 우리 역사의 축소판으로, 중요하고 굵직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몽항쟁을 비롯해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일본과의 불평등한 조약인 강화도 조약 (1876)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화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곧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숱한 이민족의 침입으로 점철된 굴곡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강화도는 대표적인 왕실의 피난지로 각광받게 된다. 실제로 대몽항쟁 시기 고려왕실이 강화도로 천도한 부분이나 정묘호란(1672)과 병자호란(1636~1637)당시 청(후금)이 침입하자 조선 왕실의 피난지로 강화도가 활용된 부분을 들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왕실 가족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 소식이 남한산성으로 전해진 건 인조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강화도의 함락은 47일간의 항쟁을 이어온 남한산성의 몰줄기를 바꾸며 우리 역사의 치욕적인 한 장면인 ‘삼전도의 굴욕’으로 귀결되었으니, 그 존재감은 남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