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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여행, 제물포를 걷는다

오랜 세월 동안 인천의 중심은 황해에 면한 포구 ‘제물포(濟物浦)’였다. 그 중요성 때문에 제물포가 인천이라는 이름을 대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물포가 원래부터 번성했던 포구는 아니었다.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의 항도로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제물포는 전혀 항구로 불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큰 선박과 전함이 놓여지는 ‘외항’이라는 것이 정박지와 다를 바 없고, 도시에 인접하여 한강 어귀의 격렬한 조수 속에 있는 ‘내항’이라는 것은 한 번에 작은 톤 수의 배 대여섯 척만이 이용가능할 정도다. (중략)남쪽과 서쪽 해안에서는 조수가 무려 7~11.6미터(!) 사이를 오르내린다.”

근대적 항구라기보다는 조그만 포구였던 제물포가 한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76년 들어서다. 한 해 전 여름 벌어진 ‘운요호 사건’과 그 결과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은 부산 외에 원산과 인천의 개항을 관철시켰다. 부산은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로, 원산은 동쪽으로 내려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교두보로, 그리고 인천 제물포는 수도인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기에 목록에 올랐다. 즉 인천의 개항은 조선 전체의 개항을 알리는 신호였다. 1883년 1월, 인구 70여 명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는 그 문을 연다.

나라 안에 세워진 또 다른 나라, 조계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는 각국 영사관들이 들어서고 항구 근처에는 조계(租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조계란 외국인이 자유롭게 통상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설정한 치외법권 구역이다. 가장 먼저 조계지를 만든 나라는 일본이었다. 현재 인천 중구청이 있는 곳에 일본영사관을 포함해 중앙동과 답동 일대의 약 3만 제곱미터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뒤 청국도 1만 6천여 제곱미터의 조계지를 만들었다. 이들의 흔적은 지금도뚜렷이 남아 있다. 물론 일본과 청국의 조계지가 이곳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일본은 1899년 기존 조계지 앞의 개펄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늘어나는 일본인들을 수용할 수 없자 신포동을 비롯해 답동과 선화동, 용동, 만석동, 화수동 등에 있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만수동이나 배다리, 화평동 등 주변부로 밀려났다. 청국 역시 지금의 내동 일대에 새 조계지를 만드는 등 청일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확장일로에 있었다. 1905년 기준으로 12,711 명의 일본인과 2,274명의 중국인, 50여 명의 서양인들이 거주했지만 정작 조선인은 10,866 명 불과했을 정도로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유입이 엄청났다.

물론 제물포에 일본인과 중국인만 드나들었던 것은 아니다. 청일 조계 경계 계단을 따라 언덕길을 계속 올라가면 공자 석상을 지나 이내 ‘자유공원’에 닿는다. 응봉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공원 일대는 애당초 미국과 독일, 영국, 러시아 등 서양 각국의 조계지가 있던 곳이다. 여러 나라가 함께 사용하다 보니 이름도 ‘공동 조계’ 혹은 ‘각국 조계’라 칭했다. 자유공원 자리에는 1889년 ‘각국공원’이나 ‘만국공원’으로 불리던 공원도 생겨났다. 말 그대로 여러 나라가 자신들의 조계지를 조금씩 떼어 만든 공원으로,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8년 먼저 조성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공원한쪽에는 ‘제물포구락부’라는 이름의 클럽도 설치해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1901년 완공한 이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해방 직후 미군 장교 클럽으로 쓰이다 한국전쟁 뒤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됐고 지금은 제물포구락부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조계와 함께 들어온 신문물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서양 각국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들의 문화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1890년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일본 신화 속의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과 메이지 천황을 주신으로 하는 ‘일본 신사’와 각종 일본계 사찰들이 들어서면서 일본 종교의 국내 유입이 본격화 됐다. 문화 공연장들도 하나둘 들어왔다. 일본 조계에 ‘인천좌’라는 상설 공연장이 세워진 것은 1897년, 지금의 사동에 ‘가부키좌’가 생긴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이어 1909년에는 지금의 신생동에 ‘표관’이 들어서면서 일본 고유의 만자이[漫才]나 신파 연극들이 공연됐다. 청국 문화의 유입은 음식으로 대변된다. 대표적인 것이 가난한 이드을 위한 음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짜장면이다. 제물포에 거주하던 청국인들은 대부분 산둥 출신으로, 일자리를 찾아 건너온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부두 일꾼이 많았는데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다. 짜장면이 등장한 것은 그 즈음이다. 반찬도 필요 없고 다른 면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천히 불어서 노동자들의 한 끼 식사로 인기를 끌었다. 또 주로 청국인들이 채소를 갖다 팔아 ‘푸성귀 전’이라 불리기도 했던 시장은 오늘날 신포시장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서양인들은 그들의 제도를 가지고 들어왔다. 예컨대 중구 내동에 성공회성당을 세운 뒤 성누가병원을 열어 의료 사업을 펼친 이는 영국성공회의 코프(Charles J. Cofre; 한국명 고요한) 주교였다. 성공회 강화도성당이 서양식과 조선식을 절충해 지은 것처럼 성누가병원 역시 실내를 온돌방으로 만드는 등 한국적 특징이 돋보였다. 이 병원은 1892년 한 해 동안만 무려 3천5백 명의 환자를 돌봤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았다. 당시 병원장을 맡았던 미국인 의사 랜디스(Barr E. Landis; 한국명남시득)는 한국 최초로 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는 등 제물포에 많은 애정을 쏟았지만 개항 후 8년째 되던 1898년, 향년 32세로 생을 마쳤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초등 교육을 실시한 이도 서양인이었다. 1890년대 초반 서울 이화학당에서 음악교사로 있던 마거릿 벤젤(Margaret Bengel)은 지금 중구 내동에 있는 내리교회에서 조선 여성들을 가르쳤고 학생 수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지금의 중구 창영동 영화초등학교 내에 있는 벽돌 건물 존슨관이 바로 1911년 영화학당이 확장 이전하며 지은 건물이다.

김하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