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천도시기의 고려왕릉, 드라마 무인시대 희종
강화 천도 시기의 고려왕릉 강화도를 무대로 한 역사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시기를 꼽으라면 단연 대몽항쟁 시기를 들 수 있다. 당시 고려는 강화도를 소도(小都)로 삼는 조치를 취했는데, ‘신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 시기를 ‘강도 (江都)’로 명명하고 있다. 이로써 강화도는 38년간 고려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했고, 강화도에 고려의 흔적들이 남겨지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재를 이야기하라면 단연 ‘고려왕릉’을 들 수 있다. 흔히 왕릉은 왕은 왕이나 왕비, 대비 등이 묻힌 고분을 말하는데, 왕릉은 단순한 고분이 아닌 당시의 정치, 사회, 철학, 기술 등이 총 집약된 역사의 축소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818년 개성유수 조종영이 고려 왕릉에 대한 조사 사실을 아뢰게 되는데, 이 때 개경과 장단, 풍덕, 강화, 고양 등에 고려왕릉이 57릉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고려 왕릉에 대한 조사와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릉의 대다수는 옛 고려의 수도인 개성(개경) 인근에 위치해 있어 접근 자체가 어려운 곳이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에서 볼 수 있는 고려왕릉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처럼 강화도에 고려 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섬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이 한몫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평상시 강화도는 유배지로 활용이 되었고, 대몽항쟁 기간 중에는 수도로서 활용이 될 수 있었다. 현재까지 강화도에는 희종의 ‘석릉(碩陵)’을 비롯해 고종의 ‘홍릉(洪陵)’, 원턱태후 유씨의 ‘곤릉(坤陵)’과 순경태후 김씨의 ‘가릉(嘉陵)’등 총 4기의 고려 왕릉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강화 천도를 단행할 때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顯陵)’과 그의 아버지이자 추존 왕인 왕륭(세조)의 ‘창릉(昌陵)’의 재궁이 함께 옮겨졌다. 또한 조선의 종묘 격인 ‘태묘(太廟)’가 함께 옮겨진 것은 강화 천도의 결정판으로, 이는 장기적인 대몽항쟁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276년 긴 항쟁 끝에 고종은 태자 왕정(=원종)을 몽골로 보내 화의가 이루어져 고려의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현릉릉’과 ‘창릉’역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고, ‘태묘’ 역시 개경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강화 천도 당시 세조와 태조의 능을 옮긴 것은 시신의 탈취를 막기 위한 것으로, 이는 과거 고구려의 사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국원왕 때 연나라가 침입해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그 시신과 왕의 생모를 데려간 일이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신과 왕의 생모를 돌려받기 위해 스스로 신하를 칭하며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따라서 세조와 태조의 능을 옮긴 것은 혹여나 몽골의 군대에 의해 그 시신이 훼손 혹은 탈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실전되어 그 위치를 알기 어렵지만 고종의 아버지인 강종의 ‘후릉(厚陵)’역시 강화도에 있었는데,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종의 재위 때에도 ‘후릉’은 여러 차례 도굴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강화천도 기간 중 세상을 떠난 희종의 왕후 성평왕후(함평궁주) 임씨의 ‘소릉’ 역시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와 관련해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와 고천리의 경계에 있는 ‘소릉고개’가 과거 ‘소릉’이 있다고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점은 참고해 볼 만하다. 무신정권을 다룬 드라마 중 하나인 사극 ‘무인시대’는 고려 의종부터 최충헌의 죽음에 이르는 무신정권 시대를 보여주었다. 당시 동아시아의…